책제목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추방' 그리고 '탈주' 이 두단어는 주로 죄를 지은 이들에게 적용이 되어 온 말이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에겐 생소하고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저자 '고병권'은 왜 이런 섬뜩한 단어를 통해 대중들에게 경고를 하는가? 그리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가 길위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사유한 흔적들이라고 말한 이책에서 크게 대중의 흐름 / 지식의 운명 / 운동의 선언이라는 세가지 큰 파트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추방'은 권력자가 범죄자에게 사회나 국가로부터 장기적인 부재를 명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예로 교도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멀쩡하게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노숙자가 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모두가 손가락질 당하는 백수가 되며 정다운 이웃들과 살던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이 되어 사회와 격리 되어가고 있는 것을 저자는 '추방'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는 없었냐고 말하지 말자. 지금 더욱 심화된 추방의 물결은 지난 십년동안, 그러니까 진보적인 입장이라고 생각했던 그 십년동안-김대중과 노무현정권 동안-꾸준히 이어져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면 서글퍼진다. 우리-상식적인 입장에서 우리를 말한다.-가 그나마 위안으로 삼던 사람들까지 지금 진행되고 있는 대중들의 추방의 근간이라고 한다. 너무 좌파적이라고? No,,, 민주주의의 상식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걸 안다면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는 것 이다. 추방은 관계적 결핍에서 오고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소통의 부재일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지금에 이르러 꽃을 피우고 있지만 지난 십년동안 꾸준히 전개 되어 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중-긍정적인 상식을 가진-은 심각한 회의에 직면해 소통에서 벗어나고 있다. 탈주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소통에서 버려지자 마지막 카드로 탈주를 선택한 것이다. 탈주의 한 예를 들어보자.-악착같이 머무러 있는 그들이야말로 국가의 추방에 대해 가장 멀리 탈주하는 자들이다.
경기도 화성의 한 어민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중략) 우리에게 법을 들이대는 것을 보고 육법전서를 불태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택의대추리에서는 주민들이 주민등록증을 반납했다. 파올로 비르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일종의 '탈퇴'다. 대중들이 국민들로부터탈퇴를 선언한 것이다.-마지막 저항이라고 이르고 싶다. 하지만 그마저도 권력자들은 헌신짝처럼 외면하며 그들의 논리를 관철시키고 있다. 추방을 당하는 입장에선 마지막 저항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행하는 입장에선 배신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배신의 논리에서 마지막으로 택 할 수 있는 것은 저항이다.

우리들은 지난 소고기 파동과 용산참사로 인하여 배운 것은 소통으로부터 추방을 당한 입장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소통의 부재가 가져다 주는 모멸감이었다. 모멸감은 분노로 이어져 거리를 메웠지만 2mb정부는 우리에게 손을 건네기 보다는 폭력의 잔인함으로 우리들에게 더 큰 분노를 자청했고 소통과 관계로 부터의 외면을 선택하며 자신의 선택를 대의민주주의로 색칠하였다. 한마디로 모든 잘못을 우리들에게 뒤집어 쒸워 버렸다. 관계의 탈주가 시작된 것이다. 소통이 없다면 저항만이 있을 뿐이고 저항의 힘이 약화되거나 할때 소통은 더욱 일방적으로 흐르며 관계의 탈주를 가속시킨다. 서로의 믿음은 사라진지 오래고 불신의 가속화만이 존재한다.

이시대를 게토의 리바이벌이라고 말하고 싶다. 게토,,,Ghetto,,,는 간단하게 말하면 유대인들이 모여 살도록 강제해 놓은 도시의 거리나 구역을 말한다. 13세기부터 있었다니 아주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눈앞에는 다른 게토가 존재한다. 1%의 행복과 부를 위한 99%의 희생을 명하며, 그들만의 성-게토-을 쌓고 있다. 이렇듯 현대의 게토는 추방된 자들의 영역이 아니라 소수의 안녕을 위한 보금자리 그리고 힘를 말하고 있다. 인종적 핍박에 의한 게토가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압력으로 인하여 게토가 형성되어 왔고, 강남이라는 단어로 대변하고 있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는 게토를 형성한다. 그것이 지식이든지, 돈이든지, 명예이든지 중요하지 않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한 방어막은 고립되었지만 찬란하다. 스스로 추방되고 있지만 자신들은 보수의 헐 껍데기속에서 지속 가능한 게토를 더욱 굳건히 하고있다. 게토로의 진입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으며, 서로간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위, 한미FTA, 평택 미군기지등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저자의 고민은소통과 공공성의 강화는 '코뮨주의'로 역설한다. 공산주의라고 옮겨 온 ‘코뮤니즘’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 표기를 할때 ‘Commun’(공동체란 뜻)과 ‘ism’ 사이에 하이픈(-)을 끼워 넣기도 하는 코뮨주의는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존재들은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그 보기이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은 더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탈국가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다른 코뮨주의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국가의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의 발명”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소통과 협력에 저자는 인문학 강의라는 것으로 화답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교도소 수감자, 농성중인 노동자, 노숙인등-에게 앎이라는 문제를 던지며 삶에 대한 답을 얻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빵'을 받을 것인가? '장미'를 받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지만 우리가 우려하고 걱정스러웠던 일은 어려운 자신들이 '장미'를 선택 함으로서 그들의 앎에 대한 갈망과 지식이 주는 만족감이 사회성을 더욱 강화하여 준다고 말한다.

'변화'라는 문제는 개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적용되며 더욱 절실함을 가지게 된다. 삶에서 앎으로 문제를 바꾸어 나갈때 각자는 스스로 추방으로 부터 벗어나고 포기를 동반한 탈주에서 벗어나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지식(앎)을 소수의 지배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수의 목소리로 표현하여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다가 갈 수 없는 앎과 삶의 문제-너무 철학적이지 않은가?-에 대중들이 원하는 소통이라는 평범한 문제까지 연관되면서도 너무 광범위한 이야기에 사실 서평을 쓰기를 포기하려했습니다. 더해서 저의 삶에 녹아 있는 문제, 아니 책에 쓰여 있는 편향적인 사상의 문제에 대한 회의도 들었지만 지식을 공유하고 네트워크화 하여 소수자라고 일컬어지는 다수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과 의지는 많은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국민의 특권과 권리가 우선시하는 상식을 이제는 기다리기 보다 쟁취하려는 많은 소수자들에게 희망의 네트워크를 이 책은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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